[주목 전시] 이정지 작가가 물었다 “왓 아트 유 두잉 나우?”

긁어낸 흔적에서 발견한 소멸과 생성의 시간

다아트 김금영 기자 2017.03.24 09:19:00

이정지 작가의 전시가 열리는 선화랑 전시장 일부.(사진=선화랑)

전시장에 휘갈겨 쓴 듯한 문자들이 가득한 화면이 펼쳐진다. 한자가 읽히기도 하고, 영어 단어가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또 화면에 가까이 다가서면 치열한 흔적에 놀란다. 쌓고 긁고 지워나간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았다.


이정지 작가가 ‘왓 아트 유 두잉 나우(What “Art” you Doing Now)?’전으로 1년 만에 다시 선화랑에 돌아왔다. 본래 ‘왓 아 유 두잉(What are you doing)?’은 “너 뭐 하니?”를 뜻한다. 그런데 작가는 이 문장에 아트를 들여오며, 자신의 예술에 질문을 던졌다. 그의 예술은 지금 어느 방향으로 향하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이정지, '「○」- 순환'. 캔버스에 오일, 210 x 210cm. 2015.(사진=선화랑)

원혜경 선화랑 대표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의 변화를 유독 뜻 깊어 했다. 이정지 작가는 묵시적이고 관념적인 모노크롬(Monochrome) 회화 작업을 지난해 개인전 때 선보였다. 그런데 올해는 기호와 문자를 더욱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대형 신작들을 내놓았다.


원혜경 대표는 “이정지 작가는 작업을 할 때 대상과의 소통을 중점에 둔다. 이번 신작에서는 메시지를 전하는 데 집중했다”며 “스스로 지금 예술가로서 무엇을 하는지 끊임없이 자문하면서 화면을 긁고 또 지우기를 반복했다. 여기엔 작가의 생동감 있는 호흡과 치열한 성찰의 과정이 담겼다. 그리고 완성된 화면에서 작가는 이 질문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던진다. 그렇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성찰하며 이야기를 만들고 소통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정지, '「○」- 22(An die Musik-Plankton)'. 캔버스에 오일, 259.1 x 97cm. 2016.(사진=선화랑)

이정지 작가는 1972년부터 현재까지 30여 회의 국내외 개인전을 열어 왔다. 이 정도 경력과 연륜이면 그간의 작업을 돌아보는 회고전 형식으로 편하게 갈 수 있을 법도 하다. 그런데 지난해 개인전 때도 “과거 작품들은 내놓지 않겠다”고 한 작가는 올해도 신작을 들고 오며 여전한 열정을 보였다고.


그렇다면 그간 이정지 작가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이정지 작가는 60~70년대 ‘탈(脫) 일루전(illusion)’을 목표로 이미지를 지우는 데 집중했다. 이 시기 작가는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사물보다 그 주변에 관심을 보였다. 이때부터 외적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이야기들을 들으려는 작가의 태도가 엿보인다. 사물이 지워졌을 때 나타나는 공간과 흔적은 그에게 흥미로운 이야기였고, 이 관심은 ‘생장(生長)’ 시리즈로 이어졌다. 그러다가 80년대 들어서서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이정지, '「○」- 322(물)'. 캔버스에 오일, 180 x 150cm. 2017.(사진=선화랑)

80년대는 이정지의 모노크롬 전개 시기로 이야기된다. 여기서 두드러진 것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반복 행위다. 85년 ‘무제’ 시리즈부터 현재 ‘O’ 시리즈까지 작가는 안료를 끊임없이 긁어내고, 남아있는 흔적에서 시간의 흐름을 읽는 작업을 이어 왔다. 이런 전개 방식으로 그의 작업은 단색화로 분류되기도 했다.


베토벤의 악보와도 같은 화면


이정지, '「○」- 1023(PLANKTON)'. 캔버스에 오일, 97 x 259.1cm. 2016.(사진=선화랑)

세계 미술 시장을 휩쓸고 있는 한국 단색화의 특징은 반복 그리고 수행으로 이야기된다. 대표적으로 박서보의 ‘묘법’이 있다. 반복적인 패턴이 돋보이는 그의 화면은 끊임없는 수행의 결과다. 점이 계속해서 차곡차곡 쌓이고 화면을 채운다. 단순한 것 같은 점 하나하나엔 작가의 정신이 담겼다. 박서보의 ‘묘법’을 비롯해 이우환의 ‘선으로부터’ 등 비움과 채움의 미학, 그리고 수행을 이야기하는 한국의 단색화는 세계 미술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 가운데 이정지 작가의 작업도 함께 주목받았다. 한국 단색화를 이야기할 때 주로 남성 작가가 이름을 올리는데, 여성 작가로서 이정지 작가는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단색화라는 틀 안에 갇히는 걸 거부한다고.


이정지, '「○」- 마르코폴로실크로드(MARCOPOLOSILKROAD)'. 캔버스에 오일, 193.9 x 259.1cm. 2016.(사진=선화랑)

이정지 작가는 과거 CNB와의 인터뷰에서 “단색화 열풍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것 같다. 단색화의 의미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작업을 보고 미국에서 발생한 미니멀리즘, 유럽의 앵포르멜에서 영향을 받은 회화들과 함께 이야기할 때가 있다”며 “내 그림은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결과”라고 생각을 밝혔다.


원혜경 대표 또한 “이정지 작가는 단색화 작가 중 하나로 분류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작가군 또는 장르를 나눠 그곳에 속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야기와 행위를 작업에 담는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이런 특징은 90년대 중반부터 도드라지게 드러난다”고 말했다.


이정지, '「○」-22(An die Musik)'. 캔버스에 오일, 80.3 x 100cm. 2016.(사진=선화랑)

90년대 중반 이정지 작가는 화면에 서체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며 독자적인 길로 들어섰다. 안진경체와 추사체를 작품에 끌어들였고, 근작을 통해서는 긁는 행위에서 발견한 흔적의 시간에 더욱 집중한다. 긁는 것은 본래 반듯했던 화면을 없애는 행위다. 그런데 그렇게 화면을 긁으면 긁은 흔적으로 인해 새로운 이미지가 생성된다. 그래서 긁는 행위는 소멸과 탄생 그 중간에 있다. 꼭 삶과 죽음 사이에 치열하게 오늘도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그래서 이정지 작가가 긁는 화면은 무엇보다 치열하고 생명력이 넘친다.


작업에는 별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는다. 보이는 대로 느끼라는 것. 그래서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이와 관련해 원혜경 대표는 이정지 작가의 작업을 “베토벤의 악보와도 같다”고 설명했다. 베토벤은 수많은 명곡을 남겼다. 그의 악보를 보면 눈으로는 한 작곡가가 만든 곡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없다. 워낙 다채로운 음표들이 펼쳐지기 때문. 그런데 귀로 음악을 듣고 느끼면 그 수많은 음표들에서 동일하게 베토벤을 발견한다. 표출되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그 안에서도 독자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 것. 이 점을 이정지 작가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이정지의 작품을 보고 마음껏 느껴보라고 그는 권한다.


이정지는 화면을 긁었다. 그리고 그대로 끝날 것만 같았던 화면은 그의 ‘O’ 시리즈처럼 돌고 돌며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그 흔적의 시간은 선화랑에서 3월 28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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