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전시] “꿈 없고요, 그냥 놀고 싶습니다”

‘돈 많은 백수’전의 시대 자화상

cnbnews 김금영 2018.01.03 13:15:12

'돈 많은 백수가 되고 싶다'전 입구는 억지로 출근길, 등굣길 등 각자의 길을 향해 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인 전철역 '꾸역꾸역'으로 꾸려졌다.(사진=김금영 기자)

(CNB저널 = 김금영 기자) “티끌 모아 티끌이요? 전적으로 맞는 말이죠.” 최근 유시민 작가와 개그맨 박명수의 대담이 화제가 됐다. 박명수는 평소 유재석과 대조되는 ‘현실적’ 어록으로 눈길을 끈 바 있다. 유재석이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잡는다”고 하면 박명수는 “일찍 일어나는 새는 피곤하다”는 식. 이중 유시민은 “티끌 모아 티끌” “참을 인이 세 번이면 호구”라는 박명수의 말에 동의해 ‘무한도전’ 멤버들의 놀라움을 자아냈다.


‘어쭙잖은’ 위로는 집어치우라는 시대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은 양경수 작가를 통해 ‘아프니까 척추’(입시에, 취업에, 격무에 시달리는 청춘이 허리를 부여잡은 모습)라는 말로 재해석됐고, 몇 년 전 유재석과 이적의 노래 ‘말하는대로’를 들으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말하는대로 이뤄질 거야”라며 희망을 품던 청년들은 “고생 끝에 골병난다” “어려운 길은 길이 아니다”라는 박명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현실을 유쾌하게 비꼬는 직설적인 화법들이 현 시대 청년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코미디언이자 방송작가인 유병재는 책 ‘블랙코미디’를 지난해 발간해 많은 관심을 받았다. 특히 청년들의 공감을 산 글들이 있다.


'무한도전'에서 화제가 된 말들. 박명수는

'어린 게’ : 어린애들한테 돈 얘기 하지 말라니. 돈 없어서 제일 서러운 건 어릴 땐데.
‘돌겠네’ : 왜 내 돈만 돌고 돌까.
‘빈손’ : 빈손이 가장 행복하다고 많이 버릴수록 행복해진다고 부자들만 말하더라. 많이 버리려면 많이 갖고 있어야지.


이 글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건 ‘돈’을 둘러싼 좌절 의식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열심히 해봤자 금수저 이길 수 없다’는 패배 의식이 전면적으로 깔려 있다. 1월 3일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서울의 평균 아파트 매매가격은 5억 4915만 원, 강남권 평균 매매가격은 6억 5009만 원에 달했다. 일반 서민은 평생을 벌어도 벌 수 있을지 모르는 금액에 내 집 마련의 꿈은 멀어져만 간다. 뼈 빠지게 벌어도 또 오르는 집값을 따라잡을 수 없다. 일단 먹고 살아야 하기에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볼 여력도 없다.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현실에 분노하다가 좌절하고, 더 나아가 포기 상태에 이른 청년들은 아무 것도 하기 싫은 상태에 놓였다.


코미디언이자 방송작가인 유병재는 책 '블랙코미디'에서 가식없이 직설적인 화법으로 현실을 꼬집어 눈길을 끌었다. 사진은 책 표지.

이것은 ‘꿈의 직업’에서도 확인된다. 청춘의 꿈 변천사가 흥미롭다. 예전엔 의사, 판사, 변호사, 검사 등 일명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 이후엔 철밥통으로 일컬어지는 공무원, 선생님이 되기를 원했다가 건물주, 재벌가의 자식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여기서 더 진화한 단계가 ‘돈 많은 백수’다. 재벌가의 자식도 가문의 사업 경영에 참여하기 위해 일을 배워야 하고, 건물주도 월세를 받기 위해 관리를 해야 한다. 이것조차도 싫은 거다. 돈을 버는 행위자체에서 벗어나 아무런 책임감 없이 그저 마음 편히 놀고먹고 싶은 것. 포기의 끝에 다다른 고달픈 청춘의 심정이다.


이 심정을 제대로 파고든 전시가 있다. 전시 제목부터 ‘돈 많은 백수가 되고 싶다’. 강남미술관에서 1월 28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장은 입구부터 사람을 놀라게 했다. 세상에. 대기 시간이 50분이란다. 놀이공원도 아닌데. 그런데 앞줄에서 사람 한 명 빠지지 않는다. 전시를 보고 싶은 열망이 가득한 눈초리로, 특히 10~30대 청년층 관람객이 대부분이었다.


1993년 엑스포 과학공원에서 발전된 미래를 꿈꾸던 마스코트 꿈돌이(맨 왼쪽)는 2018년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의 꿈을 꾸게 됐다.(사진=김금영 기자)

전시 제목을 듣자마자 빵 터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바로 내 마음”이라며 독심술 전시 같다며 깔깔 웃었다. 본격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 줄을 서는 계단에서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미지들이 배치됐다. 가령 1993년 엑스포 과학공원에서 발전된 미래를 꿈꾸던 마스코트 꿈돌이는 2018년 이 전시에서 새로운 꿈을 꾸게 됐다. 꿈돌이의 이미지에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해시태그가 붙었고, “꿈은 없고요, 그냥 놀고 싶습니다 - 꿈돌이(전직 마스코트)”라는 문구가 덧붙여졌다.


의사→공무원→건물주→돈 많은 백수라는 변천사
“돈 많이 벌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돈이 많았으면”


'돈 많은 백수가 되고 싶다'전 포스터 이미지. 돈을 한껏 뿌리는 모습이 담겼다.(사진=김금영 기자)

전시장 입구엔 돈을 한껏 흩뿌리고 있는 전시 포스터 이미지가 기다린다. 그리고 전시장에 들어서면 억지로 출근길, 등굣길 등 각자의 길을 향해 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인 전철역 ‘꾸역꾸역’이 사람들을 전시로 인도한다. 다른 역 이름은 ‘밍기적’과 ‘어기적’. 여기엔 “점심 뭐 먹지?”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어제 월차 괜히 썼네” “앉아서 딱 10분만 자고 싶다” “집에 가고 싶어” 등 사람들의 여러 생각이 뒤엉켜 있다. 생전 나쁜 짓을 해서 죽은 뒤 가는 곳만이 지옥이 아니다. ‘출근 지옥’ ‘입시 지옥’ 등 저마다의 지옥을 오늘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심정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이런 상황에 욕 같지만 욕 아닌(?) 재치 있는 문구들이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한 예로 바닥에 “이런 쉽(Sheep)!”이라는 문구와 양을 그려 놨다. 욕과 비슷한 발음이지만 확연히 다른 뜻이라 “나 욕 한 거 아닌데?”라며 능청스레 빠져나갈 수 있는 위트다. ‘다시 배우는 알파벳’과 ‘생활 속 유용한 일본어’도 꾸려졌다. 알파벳 S를 설명하는 단어로 Soulless(소울리스)엔 상대방의 말에 영혼 없이 웃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담았고, 한국어로 이야기하면 욕 같지만 일본어로는 명확히 뜻이 있는 좃또(ちょつと: 조금, 약간)를 한 벽면 가득 채워 놓았다.


저마다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모습.(사진=김금영 기자)

심신의 안정(?)을 위한 정원도 꾸려졌다. 여기에 배치된 식물들의 이름이 웃음을 자아낸다. 조팝나무, 아왜나무, 다까네패랭이, 부들 등 실제로 있는 식물들이다. 여기에 한 동물이 어슬렁대며 돌아다니는데 “주말에 상쾌한 공기 마시니까 좋지?” 말하고 있다. 이 동물의 이름은 나무타기산미치광이. 이 동물 또한 실존 동물인데 왠지 청춘들의 눈에는 주말에 등산 가자고 전화하는 상사 모습으로 비치는 게 웃픈 포인트다.


이 전시가 매력적인 건 끝까지 이런 유쾌한 '병맛' 코드를 끝까지 유지한다는 것. 전시 말미에 이르러 “우리 그래도 열심히 노력해보자”고 이야기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로또 1등, 늘 준비하자”며 “동물이 나오면 다음날 로또를 사자!” 등 실제 로또 당첨자들의 후기를 전하며 '인생은 한방'임을 강조한다. 로또 1등이 잘 발생한 지역을 지도로 표시해 놓기까지 했다. 한쪽 벽면엔 “로또 당첨만 되면 내가!!”라는 문구를 둘러싸고 사람들의 염원이 포스트잇으로 붙여졌다. 관람객들이 직접 작성한 것들로, “부장 얼굴에 사표 던지고 바로 퇴사” “바로 해외로 뜬다” “평생 여행해야지” “땅을 살 것” 등 다양한 바람이 적혔다.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 할 수 없는 말들을 정당하게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카타르시스가 전시장에 존재한다. 한국어로 하면 욕 같지만 실제로 있는 말들이다.(사진=김금영 기자)

조팝나무, 부들 등 실제로 있는 식물들의 이미지로 꾸며놓은 정원. 언어를 활용한 위트가 돋보인다.(사진=김금영 기자)

전시장을 방문한 한세연(26) 씨는 “SNS에서 정보를 얻고 찾아왔다. 사회 초년생이라 공감 가는 점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계속 경쟁하며 살아 왔는데 끊임없이 경쟁과 노력, 발전을 요구하는 환경 속 공감 안 되는 위로와 조언을 들으면 오히려 화가 난다”며 “사회생활을 하며 답답한 점들을 가식 없이 풀어내는 전시라 재미있더라.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회에서 그저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공감해주는 말들이 있는 것으로도 작은 위로를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30대 초반 직장인 김지혜 씨는 “전시장 곳곳에 설치된 포토존에서 사진 찍는 것도 재미있었다”며 “단순히 예쁜 공간이 아니라 실제 사회생활에서는 내뱉을 수 없는 문구 옆에서 사진을 찍으니 내 대신 한풀이를 해준 것 같았다. 그리고 돈 다발이 가득한 것처럼 꾸며진 공간에서는 잠시나마 행복한 기분을 느꼈다.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해소된 것 같다”고 말했다.


고달픈 현실에 어느덧 날아가버린 청춘을 형상화한 공간. '청춘'이라는 글씨가 날아가는 모습으로 꾸며졌다.(사진=김금영 기자)

로또 1등이 잘 발생한 지역을 지도로 꾸며 놓았고, 한쪽 벽면엔

전시장 입구 인트로 글은 “‘해야 하니까’ 등교하고, 출근하는 중…. 잠깐만. 그런데 그 해야 하니까는 대체 누가 정한 거지? 하! 오늘도 나는 돈 많은 백수를 꿈꾼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리고 끝은 “계속 된다고 생각하자. 너는 돈 많은 백수가 될 수 있다. 그래, 이번엔 네 차례야!”라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전시의 형태가 청년층이 선호하는 방식으로 꾸려지긴 했지만, 이것이 꼭 청년층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요즘 청년층뿐 아니라 중장년층을 비롯해 노년층 또한 돈 많은 백수를 꿈꾼다. 자식 키우느라 힘들게 보낸 세월, 이제 좀 쉬나 싶었는데 오른 물가와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는 자식들 뒷바라지로 계속 돈을 벌어야 한다. 재취업을 위해 책을 잡지만 글씨도 잘 보이지 않고 예전처럼 머리에 쉽게 들어오지도 않는다. 웃음으로 풀어내긴 했지만 돈 많은 백수가 염원이 된 우리의 현실을 새해부터 되돌아보게 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달픈 현실을 대변해주는 문구들을 전시에서 발견할 수 있다.(사진=김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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