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 전시] 명작과 디지털 사이를 걷는 미술 산책길

서울시립미술관 ‘디지털 프롬나드’전, 예술의 본질 묻다

다아트 김금영 기자 2018.06.28 10:41:30

'디지털 프롬나드'전이 열리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전시장. 미술관 소장품들이 걸려 있다.(사진=김금영 기자)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올해 3월 인공지능 연구원인 로비 바렛이 트위터에 공개한 누드화가 화제였다. 더운 여름 날 녹아내리고 있는 아이스크림처럼 보이는 그림은 마치 피카소의 초현실주의 그림을 연상케 하며 작가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림을 그린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인공지능(AI). 로비 바렛은 AI에게 수천 개의 인물 누드화를 학습하게 했고, 그 결과 탄생된 그림은 현대 개념미술 작가인 솔 르윗, 아일랜드 태생 영국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과 유사하다는 평을 들었다.

 

2016년 이세돌 9단이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바둑 대결에서 패했을 때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지만 일말의 안도감도 있었다. 그래도 예술의 영역은 인공지능이 침범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로부터 2년의 시간이 흐른 뒤 AI가 그린 누드화는 다시금 사람들이 많은 생각에 빠져들게 했다. 예술을 창작하는 것은 무엇이고, 창작 행위라는 것이 인간에만 국한될 수 있을까?

 

'디지털 프롬나드'전은 미술관 소장품과 첨단 기술을 활용한 신작들을 함께 전시한다.(사진=김금영 기자)

서울시립미술관이 개관 30주년을 맞아 현재 예술과 예술가가 처한 현실을 돌아보는 ‘디지털 프롬나드’전을 서소문분관에서 8월 15일까지 연다. 이번 전시는 미술관 소장품 4700여 점 중 선별된 작품 30점과,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하는 젊은 작가들의 뉴커미션 작업 10점을 함께 배치한 점이 눈길을 끈다.

 

소장품 30점은 ‘자연과 산책’을 키워드로 선별된 것들로, 김환기, 유영국, 장욱진, 최영림, 박생광, 김종학, 박노수, 이대원, 천경자, 최욱경, 김호득, 정서영, 이불, 김수자 등 거장들의 작품들로 이뤄졌다. 즉 전통적인 회화 양식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이다.

 

전시장 안쪽에 배윤환 작가의 '스튜디오 B로 가는 길' 영상이 상영되는 가운데 벽면엔 미술관 소장품이 전시돼 있다.(사진=김금영 기자)

그리고 함께 전시되는 10점은 오늘날 ‘미디어 아트’로 이야기되는, 첨단 기술을 이용해 작업한 작품들이다. 전시는 미술관 소장품과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작품들 사이를 자유롭게 산책한다는 콘셉트다. 전시명 ‘디지털 프롬나드’ 속 프롬나드(promenade)는 ‘산책’이라는 뜻을 가진 불어이기도 하다.

 

서울시립미술관 측은 “우리 사회는 지금 제4차 산업혁명과 AI, 사물인터넷(IoT), 신생물학의 발전을 거듭하며 급속한 변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이번 전시는 이런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작품과 창작, 그리고 예술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부터 시작한다”고 밝혔다. 이어 “작품이 어떻게 사회를 표상해 왔는지, 예술가들은 어떻게 매체를 다루고 작품을 창작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1961~2017년 사이 제작되고 이번 전시를 위해 선별된 소장품 30점을 통해 찾아보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박기진 작가의 '공'은 첨단 기술을 내장하고 있는 구형 설치물로, 이 시대 예술작품의 정의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사진=김금영 기자)

소장품에서 시작된 전시의 질문은 고도의 디지털 환경 속 작업한 작가들의 신작 작품들을 통해 이어진다. 서울시립미술관 측은 “경험이 고도화되는 디지털 환경 속 자연을 산책하는 것과 같은 인간의 실존적 경험이 어떻게 변화해갈 것인지, 다가오는 미래에도 인간은 여전히 예술을 창작할 수 있는지 등 이 시대 젊은 작가들은 기술의 발전에 따른 예술의 변화에 기대와 두려움을 동시에 갖고 있다”며 “이 가운데 과거 속에서 미래를 발견하거나 미래가 이미 현재에 도래해 있음을 깨닫는 등 또 다른 해석과 재매개의 과정을 거치는 작가도 있다”고 밝혔다.

 

이어 “전시는 드로잉, 퍼포먼스, 영상과 같은 전통적 매체부터 음성인식, AI 딥러닝, 로보네틱스, 사운드 인터랙션 등 첨단 기술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반영한 예술의 현주소를 보여준다”며 “2층과 3층 전시장과 계단, 복도에 이르기까지 미술관을 자유롭게 이동하며 예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산책할 것을 제안한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드로잉 등 전통적 매체와
전통 회화를 재해석한 미디어 아트의 공존

 

일상의실천, '포스터 제네레이터 1962-2018'. 인터랙티브 미디어 설치, 터치스크린, 프로젝터, PC, 사운드, 600 x 440cm(가변크기). 2018.(사진=서울시립미술관)

특히 이번 전시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신작들이 돋보인다.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는 작품은 박기진 작가의 ‘공’이다. 박기진은 여행이나 일상 속 실제 경험과 상상력으로 엮어낸 허구가 뒤섞인 스토리를 대형 설치작업으로 펼쳐 왔다. 신작 ‘공’은 예술 작품의 의인화 과정이 눈에 띈다. 지름 2.5m 구형 내부에 대형 스피커와 우퍼로 이뤄진 사운드시스템, 땀처럼 흘러내리게 하는 수증기 분사 시스템, 무소음 모터와 유압기를 이용한 진동 시스템, 그리고 참여 관람객들의 개인 휴대전화로 수집된 사운드를 수집, 가공해서 중계하는 IT 시스템이 내장됐다. 첨단 기술로 중무장한 구형은 단지 하나의 존재로만 정의하기 힘든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이 시대 예술작품의 정의에 질문을 던진다.

 

배윤환은 전통적인 회화의 클리세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한 신작 ‘스튜디오 B로 가는 길’을 선보인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 미술사 속 고전 명화 등 다양한 이미지에서 촉발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데 관심을 가진 그는, 초대형 3면화/2면화라는 전통적인 회화의 방식을 차용하되, 만화책이나 카툰이라는 인접 장르, 캔버스 대신 합판이나 장판과 같은 소재를 믹스 매치한다. ‘스튜디오 B로 가는 길’은 새로운 작업실을 향해 가는 여행 속 벌어지는 일들을 기록한 작업으로, 예술이 탄생되는 과정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조영각 작가의 '깊은 숨'은 다가오는 미래에서 인간과 사회, 기계 사이에 맺어지는 새로운 관계를 실험하는 작품이다.(사진=김금영 기자)

첨단 기술을 활용해 소장품을 재해석한 신작들도 눈길을 끈다. 일상의실천의 ‘포스터 제네레이터 1962-2018’이 대표적인 예다. 현실에서 디자인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 온 일상의실천 스튜디오는 ‘AI 시대에 디자인을 창작의 행위라고 할 수 있을까?’ ‘디자인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도 던져 왔다. 이 고민이 ‘포스터 제네레이터 1962-2018’에 녹아들었다. 관람객들이 미술관 소장품 이미지를 하나의 새로운 포스터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제공하는 형태다.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디자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공유하면서, 한 가지로 고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는 사회와 그 속의 예술까지 살피려는 의도다.

 

조영각의 인터랙티브 미디어 작품 ‘깊은 숨’은 아예 미술관 소장품 속으로 인공지능 딥러닝, 로보네틱스, 빅데이터 등 여러 첨단 기술을 끌어들였다. 전면 5m 크기의 영상에 인공지능이 이미지 학습 프로그램을 통해 색채와 패턴 등을 변형시킨 새로운 이미지가 생성되고, 관람객이 이미지 앞에 서면 전시장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영상에 함께 투영되는 형태다. 거대하고 촘촘한 시스템 속 인간과 기계 사이 그 어딘가에서 새로운 생산자의 발현을 끊임없이 실험하는 작품이다.

 

권하윤, '그곳에 다다르면'. 인터랙티브 미디어 설치, 키넥트 센서, 컴퓨터, 3채널 프로젝션, 사운드, 1500 x 1500cm(가변크기). 2018. 사운드 디자인: Perre DESPRATS.(사진=서울시립미술관)

권하윤의 신작 ‘그곳에 다다르면’은 전시장 산책의 절정을 이룬다. 위치 센서를 이용한 이 작품은 석철주의 ‘신몽유도원도’(2009)와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가 모티브다. 가로 5m, 세로 15m로 길게 이어진 전시 공간을 산책하면 관람객의 위치에 따라 영상 프로젝션과 사운드가 실시간 반응하면서 화면 속 산봉우리와 골짜기들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꼭 작품의 모티브가 된 ‘몽유도원도’ 속 무릉도원을 거니는 것 같다. 권하윤이 만든 디지털 풍경은 다다를 수 없는 곳을 향해 다가서는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행위로서의 예술을 상기시키고, 그 산책에 함께 동참하기를 제안하며 ‘디지털 프롬나드’로 우리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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