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105) 박미라 작가] 글 → 그림 → 애니 → 조각으로 이어지는 연극성

다아트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기자 2023.12.22 15:41:42

(문화경제 =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더 갤러리 이번 회는 세마(SeMA) 창고에서의 개인전 ‘페어링(Pairing)’(2023)에서 회화, 드로잉애니메이션, 설치 등 다양한 형식의 작품을 선보였던 박미라 작가와의 인터뷰를 싣는다.

- 다양한 장르를 동시에 선보이는 작가가 많아 익숙해졌지만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장르적 확장을 시도한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박미라의 회화와 애니메이션 속에는 하나하나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형상(이미지)들이 빽빽하게 등장한다. 그 이미지들은 어디에 기인한 것인지 궁금하다.

내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것은 펜 드로잉인데, 시간과 노동력이 많이 들어 작품 양이나 크기에 제약이 있다. 조금 더 큰 작품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에 자연스레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에게 회화는 특정한 상황이 정지해 있는 것으로 여겨져 작품에 그려진 순간의 앞뒤 상황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애니메이션을 시작했다. 매체를 너무 확장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을 때도 있지만, 나에겐 드로잉이 그려진 종이, 회화가 그려진 캔버스의 표면, 영상이 상영되는 모니터는 모두 하나의 막이기 때문에 분리되지 않고 서로 연결된다. 또한 작품 속 2차원에서 존재하던 이미지들을 화면 밖의 입체로 제작해 그 세계를 확장하고 싶어 세라믹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는 그저 새로운 매체를 다루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작업에 담긴 개념을 형식적으로도 맥락화하고 싶어 시작하게 되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는 평상시 온·오프라인에서 수집하는 이미지들, 글을 읽을 때 인상적인 혹은 떠오르는 단어들을 적어놓은 데에서 영감을 얻는다. 스스로 ‘단어 조각 모음’이라고 정해놓고 평상시에 단어나 문장을 적는다. 때로는 정말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혼재되어 작품을 구성한다. 글로 기록한 작업의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옮기는 데에서 발생하는 이격을 줄이기 위해서 꾸준히 실험하고 있다.
 

‘페어링’, 2023, 세마 창고, 전시 전경, 사진 = 배한솔, 임장활, 도판 제공 = 박미라

- 작업과 관련해 혹은 평상시에 주로 어떤 계열의 책을 읽는가? 박미라의 작품의 첫인상 중 하나는 문학적이라는 것이었다. 작가가 글을 읽으며 메모하고 영감을 받는다니 그 영향도 있을 것 같다.

작업할 땐 시를 많이 읽는다. 시는 다른 글이나 문학 작품과 달리 이미지화되는 부분이 많다. 시를 읽게 되면 작업모드가 된다. 그래서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나만의 절차처럼 시를 읽는다. 시를 읽으면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잡힌다.

- 시인이나 소설가가 박미라 작가의 작품을 보고 뭔가를 써줘도 재미있을 것 같다.

한 번 있었다. 2018년에 ‘색칠 놀이’라는 엽서 북을 제작할 때 서문의 형식으로 신철규 시인에게 시를 받은 적이 있다. 일부러 작업 노트도 드리지 않아서 오직 작품 이미지만을 토대로 써주셨다.
 

‘페어링’, 2023, 세마 창고, 전시 전경, 사진 = 배한솔, 임장활, 도판 제공 = 박미라

- 작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어떤 이야기를 생각하는지 조금만 설명을 부탁한다. 화면에 그려진 이미지들은 구체적인 설정이 있고, 이야기를 갖는 것 같다. 앞선 질문에서 말했던 문학적이라는 느낌과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전시된 작품들 사이에도 연결된 이야기가 있는지 궁금하다.

아주 구체적이진 않지만, 시작할 때 작품마다 상황이나 분위기 등을 잡아놓는다. 그에 맞도록 수집한 이미지들을 편집해 넣어보기도 하면서 작업을 진행한다. 생각과 생각을 이어 나가는 방식이다. 이미지와 분위기의 조각들이 합쳐져서 어떤 상황을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접근하는 편이다. 전시 ‘페어링’의 경우 단어의 뜻대로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는 연결점이 시각적으로 드러나길 원했다. ‘두 세계가 만나는 지점이 바느질처럼 꿰매져 있고 그 틈을 통해 이동하는 존재들이 있다면 어떻게 생겼을까?’를 상상하면서 문어, 해파리, 달팽이 같은 연체동물들을 그렸다. 예전에는 이미지 구성 자체에 조금 더 집중했는데, 최근작으로 올수록 내가 그릴 세계에 더 몰입하려고 노력한다.
 

‘페어링’, 2023, 2채널 드로잉 애니메이션, 4분 22초, 사진 = 배한솔, 임장활, 도판 제공 = 박미라

- 화폭을 채운 이미지들을 보며 관람객들이 정말 다양한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관람객들은 작가가 담아낸 이야기를 궁금해한다. 그렇다고 작가가 모든 이야기를 다 해줄 수도 없는 일이다. 이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작업을 할 때 ‘어떤 뉘앙스를 담고 싶었다’ 정도는 관람객들에게 이야기하지만 각각의 이미지들에 관한 이야기나 상황에 대한 설명을 구체적으로 전하진 않는다. 조금 무책임하게 보일 수 있지만 열린 결말이라 보면 된다. 나는 최소한의 세팅만 하는 것이고 관객마다 모두 다르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조차도 내 작업을 보고 새로운 것들을 발견할 때가 있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에서 작품을 읽어주는 것도 재미있다. 의외성이 내 작업에 있기 때문에 관객도 그것을 발견해주길 바란다.

- 서로 긴밀하게 이어진 것 같은 형상들이 캔버스를 채우고 있다. 화면을 구성할 때 어느 정도의 계획성을 갖는지 궁금하다. 또한 이미지 사이에 의미적으로나 형태적으로 어느 정도의 인과관계가 있을까?

2021년경까지는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리기 전에 밑그림으로 이미지들의 모든 것을 세팅해 두었다. 그래서 붓을 들고 마치 전사하듯이 캔버스에 옮겨 그렸다. 이 경우 아이디어를 구상할 때는 조금 힘들어도 붓을 든 뒤부터는 고민 없이 그대로 그리면 된다. 그러다 2022년부터 즉흥적 요소, 무의식적인 요소들을 더 많이 넣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고, 지금은 계획성과 즉흥성의 비율이 반반 정도 된다. 그러다 보니 매일매일 변하는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작품의 유동성이 높아져 더 어려워졌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는 과정이 훨씬 더 흥미진진해졌다.

- 드로잉 애니메이션의 작업 과정을 설명해주면 좋겠다. 회화 작품이든 애니메이션을 위한 드로잉이든 복잡한 형상들로 채워진데다가 밀도가 높아 많은 노동력이 필요할 것 같다.

애니메이션 제작을 위해 가장 먼저 글로 내용을 간략히 적고 이를 토대로 콘티(continuity)를 짠다. 그다음 배경과 움직이는 대상을 나누어 그리고, 이를 하나하나 스캔해 디지털화 한 뒤에 무빙 작업을 시작한다. 이후 여러 번의 수정을 거치고 마지막 사운드 작업으로 마무리한다.

 

페어링’, 2023, 세마 창고, 전시 전경, 사진 = 배한솔, 임장활, 도판 제공 = 박미라

- 회화 작품(의 부분)이 애니메이션에 그대로 사용될 때는 없는지,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이미지는 오직 애니메이션을 위해 제작되는지 궁금하다. 반대로 애니메이션을 위해 그린 드로잉만을 모아 전시할 계획은 없는가?

작품마다 다르다. 처음에는 그림에서부터 시작했다. ‘물의 마음’(2021)이나 ‘쌓여가는 위로들’(2021)은 드로잉과 회화가 시작이었다. 드로잉이나 회화 작업 중에 이 작품이 움직임을 가지면 더 재미있고 무언가를 더 전달할 수 있겠다 싶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경우가 있다. 그럴 땐 회화 작업의 일부분에만 움직임이 있거나 화면 전환도 많지 않다. 아트스페이스 보안 2에서의 개인전 ‘막간극’(2022)에 소개되었던 동명의 애니메이션에서부터 애니메이션만을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그 이후의 작업부터 화면 전환도 많아지고 다양한 층의 이야기를 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전시에 따라 애니메이션과 원화를 함께 걸기도 한다. 애니메이션이 어떻게 완성되고, 어떻게 움직이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유추할 수 있어서인지 관람객들이 흥미로워한다.

- 얇은 선의 느낌이 전달되는 애니메이션이어서 그럴 수도 있고 초현실적인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화면 속 세계는 몽환적이면서도 서늘하다. 행복하고 밝은 분위기는 아니다.

내 작업은 내가 느끼는 감정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관찰하면서 출발하는데, 이때의 감정은 조금 불편한 것에 더 가깝다. 그 감정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완벽히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더 집요하게 생각해 보려 하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평소에 느끼는 감정과 감각들은 굉장히 제한적이다. 나는 그것을 더 확장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래서 평소에는 잘 경험하지 못했던 낯선 느낌을 끄집어내서 경험하자고 제안하는 것 같다.

- 회화 작품의 표면이 점점 더 거칠어지고 붓을 문질러서 표현한 것 같은데 2020년 이후에 특히 그와 같은 표현이 두드러진다. 벽화를 그렸던 경험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했는데 어떤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인지 말해줄 수 있는가? 거친 표면 느낌이 시각적 밀도를 높이는 데에도 효과적일 것 같다.

2018년에 대형 벽화 작업을 했는데 말 그대로 너무 재미있었다. 단순히 대작을 그리는 데에서 오는 만족감만은 아니었고, 마치 벽과 싸우듯이 벽의 거친 질감에 맞서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데에서 오는 쾌감이었다. 그래서 캔버스에도 벽화처럼 거친 벽면을 만들기 위해 실제 건축 재료인 스타코(Stucco)를 발랐다. 작년부터는 미술 재료로 생산된 스타코를 사용하고 있다. 마른 느낌으로, 질감이 강조되다 보니 더 몽롱해 보이기도 하고 밀도도 확실히 높아졌다. 멀리서 봤을 땐 부드럽게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거친 질감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목탄이나 콩테 같은 건식 재료라고 생각하는 관람객도 많다. 얇은 붓을 사용하면 더 효과적인데 마찰감을 이용해 작업하는 과정도 재미있다.

- 흑백의 색조는 꽤 오랫동안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이후 작업에 색이 등장할 확률은 어느 정도인가?

표현법과 관련해 2020년도부터 지속되고 있는 거친 표면 처리를 어떻게 전개해나갈지에 대한 고민이 가장 크다. 이 고민이 작품을 통해 정리되면 그다음에야 색에 대한 고민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장은 색을 사용하지 않을 듯하다. 색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검은 펜 드로잉에서 시작해 자연스럽게 캔버스 회화로 옮겨가서 아직 색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

‘마음 너머’, 2023, 백자토, 드로잉 애니메이션, 가변 설치, 사진 = 배한솔, 임장활, 도판 제공 = 박미라
‘파랑새’, 2023, 백자토, 15 x 32cm, 사진 = 배한솔, 임장활, 도판 제공 = 박미라

- 전시 ‘페어링’에는 백자토로 만든 입체 작업 ‘파랑새’(2023), ‘마음 너머’(2023)도 있었다. 앞선 답변에서 간단히 설명해주긴 했으나 회화와 애니메이션만으로 전시를 완성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 작품을 함께 전시한 이유는 무엇인가?

회화와 영상의 연결고리가 되어주는 작품이라고 보면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세라믹 작업은 회화 속 가상의 세계에 머물던 이미지가 작품의 표면을 뚫고 나와 실재하는 공간에 존재하게 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입체를 만들 때 주변에서 형태감이나 완성도가 높아 보일 수 있다며 캐스팅을 추천했지만, 내가 구현하고자 했던 것은 완벽한 형태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나의 드로잉이 입체화된 것처럼 손으로 조물조물 만들어낸 느낌을 전하고 싶어 백자토로 형상을 만들어 구웠다. ‘파랑새’(2023)는 애니메이션 ‘페어링’(2023)의 마지막에 그림자놀이를 하는 이미지와 이어지는 작품이다. ‘마음 너머’(2023)는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감독의 영화 ‘파벨만스(The Fabelmans)’(2023)에 나오는 장면을 응용한 것이다. 주인공이 자기 어머니에게 영화를 보여줄 때 영사할 곳이 없자 자기 손을 스크린 삼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정말 낭만적이고 따듯하게 느껴졌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라는 전시의 콘셉트와도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막간극’, 드로잉애니메이션, 세라믹, 모래, 4분 20초, 2022, 사진 = 배한솔, 임장활, 도판 제공 = 박미라

- 박미라의 작업에 연극적 요소가 있다는 설명이 어떤 뜻인지 궁금하다.

내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내 작업을 본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연극적이라는 피드백을 주다 보니 연극적이란 게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내가 내린 연극성의 특성이 사전적 의미와는 다를 수 있지만, 현재까지 내린 판단은 둘 다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모를 어떤 시공간을 만든다. 내가 특정한 공간을 만들고, 거기에 인물들이 놓이고, 인물들이 어떤 상황을 만드는 것이 연극과 비슷하다. 또한 연극에는 막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막은 내 작업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차원을 넘나들고, 드러나지 않고 감춰진 이야기도 있다. 빛이 없으면 무대 위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빛이란 요소도 중요하다. 내 작업에는 색이 없어서 명암이 중요한데 이 역시 빛이 없으면 불가능한 요소이다. 마지막으로 정면성이나 과장된 표현도 비슷하다. 그래서 이런 특징을 조금 더 강화하는 쪽으로 작품을 완성했고, 작년에는 개인전 제목도 ‘막간극’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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